嗟我先生道 아, 우리 선생이 가신 길은 海東百世春 해동에 백세토록 영원하도다. 五朝冢宰積 다섯 왕 총재로서 이룬 업적 十分事功神 그 공 귀신을 섬겨도 충분하리. 模月難模色 달은 본떠도 색깔은 본뜨기 어려우리 畵龍只畵身 용을 그린 것인지 단지 몸을 그린 것인지徒將遺像得 
①寒泉 한천 掩耳洞中老 엄이동에 사는 노인이 無端日弄波 무단히 날마다 물결을 희롱한다. 雖爲水所辱 물은 비록 욕을 당해도 不害其淸何 어떻게 그 맑음 잃지를 않는가? ②山月 산월 寂寞夜山齋 적막한 밤 산 속 집 孤吟頻蹴月 외로움에 읊조리며 달을 자꾸 밟지만. 月應不介嫌 달은 싫은 내색 하나 없어
광주 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이 올들어 연달아 3건의 인문공모사업에 선정되어 1억2천1백만원을 지원받아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창달 사업에 기여하게 됐다.서구문화원은 27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발표한 2018년 인문활동가 양성 파견사업에 교육강연형과 기획운영형에 각각 선정되어 8월부터 6개월동안 2100만원의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사)봉산사 묘정비鳳山祠廟庭碑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의 건립 취지와 그 사당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다. 1976년에 묘정비를 세워 기록을 남겼다.전 성균관장 영가永嘉 권중해權重海가 글을 지었고 덕양德陽 기영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에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어요. 엄이재掩耳齎 뒤편에 있는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말합니다. 이 엄이재는 한말 유학자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봉황산鳳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
서구 용두동과 남구 압촌동광주 무등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수레바위산 - 소룡봉 - 분적산 - 금당산을 지나 화방산 - 송학산 - 봉황산 - 등룡산으로 이어지다가 승촌에서 영산강을 만나 끝을 맺는데 그중에 봉황산은 167.8m이다. 서창과 대촌의 중간에 있으면서 눌재로를 사이에 두고 송학산과 마주보는 산이다.
광주시 서구 전평길 62(매월동)1929년매월동 개산마을에는 흥성 장씨興城張氏의 향제소享祭所이며 효우공孝友公 장창우張昌友(1704~1774)의 제향을 위한 재각이 영식재永式齋이다. 1928년 11월 문중회의에 의해 건축하기로 의결하고 1929년 8월에 건립되었다. 장정섭張整燮 장안섭張安燮 장창섭張昌燮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봉산사가 있었다.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었다고 해서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현와 고광선이 지낸 곳이다.주변 숲속에 읍궁암
서구 동하길 10(세하동)만귀정晩歸亭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1704∼1774)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일제강점기 정자이다. 원래 건물은 소실됐으나 1934년에 다시 중건됐고, 1945년에 고쳐지었다.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서구 주월동농은정農隱亭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참판 농은農隱 이돈식李敦植(1847~1920)이 세웠고 춘담 기동준(1860~1918)의 기문과 현와 고광선(1855~1934)의 명문이 있다. 옛 광주은행 화정동지점과 보성보寶城堡 인근 주월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서구 동하길 10 (세하동)서구 세하동,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서창평야의 넓은 들고 그 가운데로 극락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넓은 서창평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마을 입구에 자리한 옛 정원형 정자가 있다. 마을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3개의 정자가 나란
서구 매월동 (동산부락)만취정(晩翠亭)은 1925년에 김용희(金容希, 1860.5.27~1927.7.21)가 매월동 화개산 기슭에 처소로 지었다. 김용희의 호는 송암(松菴) 또는 만취정이다. 유고가 2권 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와 고광선이 행장을 썼다. 삽봉 김세근 장군의 후손이다.만취정은 『광
서구 금화로 23(금호동)『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0리 거리에 일신당日新堂이 있었다. 뒤로는 얕은 산이 둘러싼 고즈넉한 만호마을이었다. 개촌 때는 만호곡晩湖谷이라 불렀고 정자는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졌다. 1827년 이 마을에 살던 당시의 의식있는 지식인 3성씨인 음성박씨 일산日山 박호언朴浩彦, 순천박씨